자이언트 스텝과 재즈 밈
'콜트레인의 이 엄청나게 획기적인 음악에 쫓아오지 못하고 굴욕 당한 타미 플래너건'
처음 재즈를 접할 무렵 Giant Steps에 항상 따라붙는 설명이었다.
당시 접했던 거의 모든 재즈 서적에 비슷한 설명이 있었다. 나는 그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시종일관 고속열차처럼 내달리는 콜트레인의 연주와 마일드한 템포로 솔로를 시작해 느리게 마무리하는 플래너건의 연주가 꽤나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콜트레인의 위대함을 띄우려 플래너건의 분투를 더 까내리는 경향도 있었다.
(언제나 신격화와 신화 만들기에 몰두하는 이들이 문제다). 대체로 영웅주의에 빠진 팬들과 셀링 포인트를 강화해야 하는 업계가 이런 분위기를 합작하곤 한다.
요즘 유튜브 댓글을 보다 보면 사뭇 분위기가 바뀌어 있다. 예전에 애니메이션으로 그를 조롱하는 영상 마저 있었다.
업로드 초반 그 영상의 댓글들은 영상에 동조하는 내용이 주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최근에 다시 보니 그의 연주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들이 많다.
재미로 밈을 즐기는 것과 별개로, 한 단면으로 플래너건을 접하는 사람이 많아서 어느 정도 배경 이해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이언트 스텝 녹음의 배경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사람
자이언트 스텝의 음악적 컨셉은 콜트레인이 앨범 발매 한참 전부터 오랫동안 구상해 왔다고 한다(수년간 준비했다는 썰도 있다). 콜트레인은 엄청난 연습광, 준비광이어서 실제 녹음 전 수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이 곡을 연습하며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미 플래너건은 오리지널 세션 멤버 조차 아니었다. 원래 시더 월튼을 눈여겨보던 콜트레인의 요청으로 월튼이 스코어를 받아 연습했다. 그러나 그는 한달여 쯤 뒤 진행된 첫 녹음 세션에서 솔로를 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참 후에 이뤄진 인터뷰에서 그는 ‘곡이 너무 어려워 솔로를 사양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대해서는 솔로를 망치더라도 시도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60주년 에디션에는 시더 월튼의 여러 미발매 테이크가 수록돼 있지만 솔로 연주는 하나도 없다.)
이런 와중에 첫 세션 후, 월튼이 디지 길레스피의 호출을 받아 한 달 정도 투어를 다녀온 사이, 콜트레인은 토미 플래너건에게 연락하여 녹음을 완료했다(자세한 내용은 이 인터뷰 참조).
파이널 세션에 초청 받은 플래너건은 즉석에서 악보를 받아 연주에 들어갔다. 보자마자 매우 복잡한 악보를 보고 발라드 연주일 거라고 짐작했다고 전해진다. 그 상황에서 콜트레인은 이 생경한 진행의 곡을 초스피드로 연주했다.
이건 플래너건 뿐 아니라 어느 탑 피아니스트가 와도 안 된다. 기존과 완전히 다른 어법의 곡을 즉석에서 보고 완벽한 솔로를 연주한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와중에도 플래너건은 솔로 초반에 콜트레인의 큰 스텝에 그 나름대로 보조를 맞추려 노력하고, 더 이상 진행이 어려워진 와중에도 매우 부드럽게 솔로를 마무리한다. 무엇보다 곡 전반에서 플래너건의 컴핑이 너무 좋다.
콜트레인은 애틀랜틱의 데드라인에 쫓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혹은 플래너건에게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플래너건의 연주를 그대로 실었다. 콜트레인이 플래너건의 솔로를 최소한 싫어하진 않았다는 방증 아닐까.
그 이후로 수백 개 이상의 버전이 쌓였다(아마 수천 개일지도 모른다). 이 곡이 재즈 교과 과정에 포함되며 누구나 배워야 할 필수 관문처럼 여겨진 지도 한참이다. 최초 녹음 속 솔로가 다른 이들만큼 화려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건 정말 넌센스이다.
타미 플래너건의 조용하지만 무거운 발걸음
이토록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녹음했던 것은 플래너건에게도 아쉬운 일이었을 테다. 그는 후에 이 곡을 최소 두 차례 이상 다시 녹음했다.
1981년 녹음된 기타리스트 로드니 존스와의 공동리더 [My Funny Valentine] 앨범과 1982년 녹음된 자신의 트리오 앨범 [Giant Steps]를 통해서다.
Rodney Jones/Tommy Flanagan Quartet – Giant Steps
여기에서는 짧지만 강렬하고 흥미로운 솔로를 들려준다.
Tommy Flanagan Trio – Giant Steps
트리오 버전에는 아예 작정한 듯 대놓고 물오른 연주를 들려준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연주는 힘차게 스윙하면서도 관조적이고 사색적인 느낌을 준다. 그를 위한 다른 글은 링크 참조